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문단 편집) === 1967년 신년 사설 === 1967년 1월 1일, [[인민일보]]와 '홍기' 잡지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대혁명이 막을 내렸다.'는 사설을 발표했다. >"1967년은 포괄적인 민족계급 투쟁의 해가 될 것이다. (중략) 프롤레타리아는 다른 대중들과 함께 당의 소규모 자본주의자들과 사회적으로 독을 품은 뱀들에 대한 한 해에 걸친 공격을 시작했다." 이 사설은 1966년 12월 26일 마오쩌둥의 생일 연회 때 마오쩌등에게 받아낸 서면 승인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마오쩌둥의 정신을 배우자며 즉각적으로 행동했다. 당시 산업 기술 총국과 상하이의 보수파 및 조반파 간의 투쟁은 상하이의 경제 및 사회 질서를 위태롭게 했다. 12월 31일,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제1서기 [[천비셴]]에게 "교통을 중단시키지 말고 혁명의 질서를 잘 지켜라."고 지시했다. 이에 천비셴은 상하이의 다양한 정치 파벌들을 소집해 "마오쩌둥 주석의 혁명 정신을 파악하고 이를 철저히 이행하라!"며 긴급 조치를 촉구했고, 문회보는 <상하이 전 인민에게 고한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또한 문회보는 1월 4일에 천비셴과 수십개의 대중 조직이 초안을 작성한 <긴급통고>를 기사에 실었다. 이 두 성명서는 부르주아들을 비판하는 말을 사용했지만, 그 주된 목적은 상황을 안정시키고 상하이의 경제활동을 재개하는 것이었으며 상하이 시장 차오디추가 계속 시장직을 역임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은 긴급통보에 동의하지 않았고 상하이 시정위원회를 완전히 패배시키기 위한 총회를 소집했다. 총회는 차오디추가 더이상 상하이 시장이 아니며 "반혁명 범죄"를 고백하고 반역자들에 의한 생산 및 교통 혼잡에 대한 책임을 상하이시위원회에서 자아비판할 것을 명령한 3건의 일반 명령을 발표했다. 또한 야오원위안은 상하이 시의회를 완전히 제구성해야 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리하여 상하이 시정위원회와 장춘차오 및 조반파 홍위병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